반응형
시작일 : 2024.12.24
종료일 : 2025.01.23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733127
1장 가깝지만 너무 다른 두 도시
꿈을 가진 미국의 발명가라면 진작부터 창업에 필요한 자금 조달이 수월했다는 뜻이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은행과 금융기관의 경쟁이 치열해서 상당히 낮은 금리로 자금을 빌릴 수 있었다.
이번에도 멕시코의 사정은 달랐다. 실제로 멕시코혁명Mexican Revolution이 발발한 1910년까지도 멕시코에서 영업한 은행은 42개에 불과했고 그중 두 곳이 총 은행 자산의 60퍼센트를 차지했다. 경쟁이 치열했던 미국과는 달리 멕시코 은행 간에는 사실 경쟁이랄 게 없었다. 경쟁할 필요가 없으니 은행은 고객에게 굉장히 높은 금리를 요구할 수 있었고, 대체로 엘리트층과 이미 부를 축적한 이들에게만 대출을 해주곤 했다. 엘리트층과 부유층은 그렇게 자금을 끌어다 경제 전반을 강하게 장악할 수 있었다.
2장 맞지 않는 이론들
빈곤의 굴레를 초래한 제도적 패턴을 깨고 나와 성장의 길로 접어드는 데 성공한 나라는 무지했던 지도자가 느닷없이 정치나 경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거나, 덜 이기적이 되었다거나, 더 나은 경제 전문가로부터 조언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이 책에는 영웅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가령 중국은 숱한 국민을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게 했던 경제정책에서 벗어나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정책으로 전환한 나라다. 나중에 더 자세히 논의하겠지만 이런 변화는 중국공산당이 농지와 산업의 공동 소유가 알맹이 없는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할 뿐이라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 덩샤오핑과 그 측근들은 정적들만큼이나 이기적이긴 했어도 그들과 다른 이해관계와 정치 목적을 품고 있었다
3장 번영과 빈곤의 기원
한국전쟁 와중에 기틀이 세워지고 공산주의가 38선 이남까지 확산될 위협에 맞서야 했던 남한 정부도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승만은 물론 그만큼이나 유명한 후계자 박정희 장군 역시 독재자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사유재산이 인정되는 시장경제를 채택했고 1961년 이후 박정희는 성공적인 기업에 대출과 보조금을 몰아주며 사실상 고속 경제성장에 온 나라의 힘을 실었다.
한편 38선 이북의 상황은 달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항일 공산주의 빨치산 부대를 이끌던 김일성이 소련을 등에 업고 1947년 독재자로 자리를 굳혔고 이른바 주체사상의 일환으로 엄격한 중앙계획경제를 도입했다. 사유재산이 불법화되고 시장 역시 금지되었다. 북한 주민은 시장뿐 아니라 삶의 모든 측면에서 자유를 제한받았다. 물론 김일성과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김정일 주변의 극소수 지배 엘리트 계층은 예외였다.
5장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
착취적 제도는 두 가지 이유로 지속 가능한 기술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사실을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경제적 인센티브가 결여되어 있고 엘리트층의 반발이 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단히 비효율적으로 사용되던 자원을 공업에 모조리 재분배하고 나니 국가가 명령으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이 거의 남지 않았다.
소비에트 경제에서 인민이 열심히 일할 인센티브가 거의 없다는 사실은 스탈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게 당연한 대응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개선되는 부분이 있으면 이를 보상하려 간간이 인센티브를 주기도 했다. 가령 생산성이 떨어지는 지역에 식량 공급을 늘려주는 식이었다. 이와 더불어 스탈린은 일찍이 1931년 초반에 이미 금전적 인센티브가 없어도 기꺼이 일하는 ‘사회주의 남성과 여성’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포기한 바 있었다. 그가 유명한 연설을 통해 ‘평등에 목을 매는 짓equality mongering’을 강하게 비판한 이후, 직업마다 임금이 달라졌을 뿐 아니라 상여금 제도도 도입되었다.
어떻게 돌아가는 제도였는지 살펴보자. 중앙계획 방식의 회사라면 계획에 따라 생산량 목표를 정하고 맞춰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계획을 재협상하고 수정하는 일이 잦기 마련이다. 1930년대부터 소련 노동자도 목표 생산량이 달성되면 상여금을 받았는데, 꽤 많은 상여금을 주기도 했다. 예컨대 경영진이나 고급 엔지니어는 임금의 37퍼센트까지 상여금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상여금은 기술적 변화 측면에서는 온갖 부작용을 낳아 인센티브를 오히려 약화시켰다. 가령 혁신을 추구하면 현재 생산수단에서 자원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목표 생산량 달성이 어려워져 상여금을 못 받을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이와 함께 목표 생산량은 대개 이전 생산량 수준을 잣대로 한다. 그러다 보니 생산량을 확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엄청난 인센티브만 만드는 꼴이었다. 생산량을 늘려봐야 앞으로 목표치를 ‘대폭 상향’해야 하니 미래에는 더 많이 만들어내야 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적당히 생산하는 것이 늘 목표를 달성하고 상여금을 받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게다가 상여금은 달마다 지급했다. 오늘을 희생해서 내일 더 많이 얻자는 것이 혁신이기 때문에 바로 코앞의 성과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1956년에 들어서야 상황이 바뀌었다. 마침내 혁신의 생산성에 비례해 상여금이 지급되어야 한다고 규정한 것이다. 하지만 기존 가격 체계를 사용해 경제적 효익을 측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생산성을 계산했기 때문에 이 역시 혁신 욕구에 불을 지피는 인센티브는 되지 못했다. 이런 정책들이 가져다준 비뚤어진 인센티브의 사례는 수도 없이 늘어놓을 수 있다. 가령 혁신 상여금의 규모는 기업의 총임금에 따라 제한을 했기 때문에 노동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혁신을 창출하거나 채택하려는 인센티브를 대폭 줄여버리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7장 전환점
리의 탁월한 발명품에 대한 당대의 반응은 이 책의 핵심 개념을 여실히 보여준다. 신석기혁명에서 산업혁명까지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나아지지 않은 주된 이유는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기술혁신은 인류사회에 번영을 가져다주지만, 옛것을 새것으로 갈아치우고 특정 계층의 경제적 특권과 정치권력을 파괴한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업무 방식이 필요하고, 이런 것들은 곧잘 리와 같은 새로운 주역과 함께 등장한다. 사회에 번영을 가져준다 해도 그 때문에 촉발되는 창조적 파괴 과정은 옛 기술을 사용해 일하는 이들의 생계를 위협한다. 가령 리의 기술이 도입되었다면 손뜨개질을 하는 노동자는 실업자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10장 번영의 확산
중국은 절대권력을 틀어쥔 황제가 다스리는 중앙집권적 관료제국이었다. 물론 중국 황제 역시 권력에 도전을 받았던 게 사실이고, 그중 가장 신경 쓰이는 위협이 반란이었다. 1850년에서 1864년까지 중국 남부 전체가 태평천국의 난으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그 와중에 수백만 명이 전쟁에 휘말리거나 굶어 죽었다. 하지만 중국 황제에 대한 견제가 제도화되지는 않았다.
일본 정치제도의 구조는 이와 달랐다. 막부가 천황을 밀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도쿠가와 가문의 권력이 절대적이지도 않았고 사쓰마 등의 번은 독립을 유지했으며 심지어 나름대로 해외무역을 할 수도 있었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영국 산업혁명이 가져다준 중요한 결과 중 하나는 중국과 일본의 군사적 취약성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중국은 이미 1839년에서 1842년까지 계속된 제1차 아편전쟁 당시 영국의 해군력에 무릎을 꿇었고, 일본 역시 1853년 매슈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전함이 도쿄만에 등장하자 중국과 다름없는 위협을 느꼈다.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쇼군을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으로 이어지는 개혁을 추진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도 경제적 낙후성이 군사적 낙후성을 초래한다는 현실 인식 때문이었다. 사쓰마번의 지도자들은 경제성장(더 나아가 일본의 생존)이 제도적 개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기존 제도에 권력을 의존하는 쇼군은 개혁을 반대하고 나섰다. 개혁을 추진하려면 쇼군을 무너뜨려야 했고, 실제로 결국 막부체제는 막을 내리게 된다. 중국에서도 상황이 비슷했지만 애초에 정치제도가 달랐기 때문에 황실을 전복하기가 한층 어려웠고, 1911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중국은 제도 개혁 대신 근대 무기를 수입해 영국의 군사력에 맞서려 했다. 반면 일본은 독자적인 군수산업을 구축했다.
11장 선순환
루스벨트의 법안이 “불필요하고 쓸모없으며 위험하기 짝이 없는 헌법 정신 포기 행위이며… 전례도 없고 정당화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상원은 70 대 20으로 법안을 수정하도록 위원회에 돌려보냈다. ‘법관 개혁’과 관련된 요소는 모조리 삭제되었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권력을 옥죄는 대법원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 없게 된 것이다. 대통령 권한에 대한 제약은 변함이 없었지만, 타협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법원이 사회보장법과 전국노동관계법은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두 법안의 운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일화에서 배워야 할 전반적인 교훈이다. 포용적 정치제도는 포용적 경제제도에서 벗어나려는 큰 움직임을 견제할 뿐 아니라 정치제도 자체의 지속성을 훼손하는 시도 역시 제동을 건다는 사실이다. 민주당이 장악한 상·하원은 구미에 맞게 법원을 물갈이해 모든 뉴딜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 누가 보아도 유리한 상황이었다. 18세기 초 영국의 정치 엘리트층은 법치주의를 중단하면 군주로부터 쟁취해낸 소득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의 상·하원 역시 대통령이 사법부의 독립성을 훼손한다면 정부체제에서 힘의 균형이 무너져 자신들도 무사하지 못할지 모르며 다원적 정치제도마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13장 오늘날 국가가 실패하는 이유
1991년 메넴은 아르헨티나 페소화를 미국달러에 연동시키는 고정환율제를 채택했다. 법적으로 1페소를 1달러에 묶어버린 것이다. 당연히 환율은 변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게 해결된 듯 보였지만, 과연 그랬을까? 고정환율제를 유지하겠다는 정부의 일념을 보여주려는 듯 달러화로 은행계좌를 개설하라고 대국민 설득에 나서기까지 했다. 달러는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상점 어디서나 쓸 수 있었고 도시 내 어떤 현금 인출기에서도 인출이 가능했다.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 정책일지는 몰라도 커다란 허점이 도사리고 있었다. 아르헨티나 수출품은 엄청나게 비싸진 반면 수입품은 헐값이 된 것이다. 수출은 씨가 마르는데 수입은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1월이 되자 평가절하가 공식적으로 단행되었다. 이제 1페소에 1달러가 아니라, 1달러를 얻으려면 4페소가 필요했다. 언뜻 보면 미리 달러화로 환전해둔 예금자의 선견지명을 증명해주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부질없는 일이었다. 정부가 강제로 달러 계좌를 페소 계좌로 바꾸면서 종전의 1 대 1 환율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1,000달러를 저축해두었던 사람의 수중에 이제 달랑 250달러만 남았다는 뜻이었다. 정부가 국민의 저축을 75퍼센트나 몰수해버린 것이다.
14장 기존 틀을 깬 나라들
인류학자 존 코머로프John Comaroff는 또 다른 츠와나 부족인 로롱Rolong의 정치 역사를 자세히 연구한 바 있다. 코머로프에 따르면 츠와나 부족은 표면적으로 추장의 세습 방법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 그런 규정은 나쁜 지배자를 몰아내고 유능한 후보를 추장으로 내세울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고 한다. 추장은 누구나 성취할 수 있는 자리이고, 그 도전에 성공한 자라면 정당한 후계자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15장 번영과 빈곤의 이해
그렇다고 착취적 정치·경제 제도가 경제성장과 늘 어긋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엘리트층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더 많은 자원을 착취하려고 최대한 높은 성장을 장려하기 마련이다. 최소한의 중앙집권화를 달성한 착취적 제도하에서는 그런대로 성장이 가능한 사례도 적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은 두 가지 이유에서 지속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첫째, 지속적 성장은 혁신이 있어야 하는데, 혁신은 반드시 창조적 파괴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창조적 파괴는 경제적인 면에서 옛것을 새로운 것으로 갈아치울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기성 권력 기반을 뒤흔들기 마련이다. 착취적 제도를 장악한 엘리트층은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한 나머지 이를 거부하기 때문에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은 어쩔 수 없이 단기에 그치고 만다. 둘째, 착취적 제도를 장악한 이들이 사회 전체를 희생시켜가며 자신들의 배를 채울 수 있으므로 착취적 제도하의 정치권력을 탐내는 이들이 많아져 수많은 집단과 개인이 권력 투쟁을 벌이게 된다.
잉글랜드 명예혁명, 프랑스혁명, 19세기 영국의 민주화 과정에서도 소책자와 책이 정보를 제공하며 대중을 들끓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보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새로운 형태의 언론도 주목받고 있다. 블로그, 익명 채팅, 페이스북, 트위터 등 신생 언론은 이란 국민이 2009년 아마디네자드Ahmadinejad 정권의 부정선거 및 이후 억압 정책에 맞섰을 때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이 책이 끝나갈 무렵까지 현재 진행형인 아랍의 봄 민중봉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권위주의적 정권은 자유언론의 중요성을 의식하기 때문에 갖은 수를 써서 억압하려 들기 마련이다.
반응형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03. 선량한 차별주의자 (0) | 2022.03.13 |
---|---|
2022-03. 서른 전에 한 번쯤은 심리학에 미쳐라 (0) | 2022.03.13 |
2022-01. 코딩 몰라도 됩니다 (0) | 2022.01.15 |
2021-10. The Giver 더 기버 (0) | 2021.10.04 |
2021-09.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0) | 2021.09.05 |